1. 가장 조용한 리스트의 음악, 위안
프란츠 리스트라고 하면 흔히 화려한 피아노 연주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무대 위에서 눈부신 기교를 선보이며 청중을 열광시켰던 리스트는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화려함과 정반대편에 놓인 조용하고 내면적인 음악도 존재합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피아노곡 위안(Consolations, S.172)입니다.
위안은 모두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소품집입니다. 첫 번째 버전은 1844년에서 1848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우리가 현재 자주 접하는 제2판은 1849년부터 1850년 사이에 완성되었습니다. 1850년에는 제2판이 출판되었습니다.
제목부터 매우 인상적입니다. Consolation이라는 말은 슬픔이나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용히 감싸고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위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위안은 리스트의 다른 작품처럼 청중을 압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빠른 옥타브와 폭발적인 화음 대신, 단순한 선율과 섬세한 화성, 여백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리스트의 가족사와 함께 바라보면 상당히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리스트의 삶에는 훗날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가족 스캔들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는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의 딸 코지마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관계입니다.
2. 리스트의 딸 코지마, 그리고 바그너
코지마 리스트는 1837년 프란츠 리스트와 작가 마리 다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그녀는 음악가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하게 됩니다.
여기서 음악사의 운명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합니다.
한스 폰 뷜로는 리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운 제자였으며, 동시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857년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했습니다. 이후 뮌헨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지휘했고, 1865년에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바그너가 훗날 자신의 음악을 가장 헌신적으로 옹호하던 뷜로의 아내 코지마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바그너와 코지마의 관계가 깊어진 시기는 1860년대 중반입니다. 당시 코지마는 이미 뷜로의 아내였고, 바그너 역시 미나 바그너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면서 이 관계는 단순한 소문을 넘어 실제적인 가정 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코지마는 1868년 뷜로를 떠나 바그너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1870년 결혼했습니다. 코지마와 바그너 사이에서는 이졸데, 에바, 지크프리트가 태어났습니다.
19세기 유럽 음악계에서 이 사건은 그야말로 거대한 스캔들이었습니다.
3. 라이벌 바그너에게 딸을 빼앗긴 아버지
여기에서 리스트와 바그너의 관계를 단순히 라이벌 관계라고 표현하면 역사적으로 조금 부족합니다.
두 사람은 음악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리스트는 바그너의 음악을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지휘했고, 바그너의 음악적 이상을 유럽 음악계에 알리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코지마와 바그너의 관계가 시작되었을 때 리스트가 느꼈을 감정은 단순한 음악적 경쟁심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바그너는 단순한 음악적 동료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리스트의 딸 코지마는 자신의 남편을 떠나 아버지가 오랫동안 음악적으로 지지해 온 바그너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 때문에 리스트와 바그너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코지마가 바그너와 함께 살던 시기에는 두 사람 사이가 상당히 긴장되었지만, 1870년 코지마와 바그너가 결혼한 이후에는 다시 화해하는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이후 리스트는 바그너의 음악과 관련된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점이 이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4. 위안은 불륜을 위한 음악이었을까?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리스트의 위안은 코지마와 바그너의 불륜 사건을 계기로 작곡된 작품이 아닙니다.
위안의 제2판이 완성된 것은 1849년에서 1850년 사이이며, 코지마와 바그너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60년대 중반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는 십수 년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위안을 코지마의 불륜이나 바그너와의 사랑을 직접 묘사한 음악이라고 설명한다면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작품의 제목과 리스트의 훗날의 삶이 만들어내는 역설입니다.
위안은 아주 조용하고 사색적인 음악입니다. 그런데 리스트의 가족사를 뒤돌아보면 그의 삶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이별, 결혼과 별거, 예술가들의 경쟁과 우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훗날 자신의 딸이 자신의 음악적 동료와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과 음악의 경계마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위안을 들을 때에는 작품 자체의 탄생 배경과 훗날의 가족사를 구분하면서도, 두 세계가 만들어내는 묘한 대비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5. 제3번이 특별히 사랑받는 이유
위안 여섯 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제3번입니다.
제3번은 D♭장조의 느린 곡으로, 화려한 기교를 앞세우기보다는 매우 단순하고 노래하는 듯한 선율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제2판의 제3번은 Lento placido라는 지시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이 곡의 매력은 리스트답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리스트라고 하면 거대한 음역을 오가는 아르페지오와 눈부신 옥타브, 복잡한 패시지워크를 떠올리기 쉽지만, 제3번에서는 그러한 과시적인 피아니즘을 거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는 듯한 분위기가 강합니다.
그래서 이 곡은 피아노 전공자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친숙하게 다가갑니다.
단순한 선율이라고 해서 음악적으로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리스트는 제한된 재료를 가지고 음색과 화성의 미묘한 변화를 만들어내며,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울림 자체를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6. 화려한 비르투오소에서 내면의 음악으로
위안은 리스트라는 작곡가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의 리스트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오케스트라처럼 들리게 만들었고, 당시의 청중에게 거의 마술처럼 느껴질 정도의 연주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리스트의 음악적 세계가 항상 화려함만을 향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음악과 후기 피아노 작품을 비롯해 더욱 간결하고 내면적인 음악을 탐구했습니다. 위안은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섯 곡은 전체적으로 크고 극적인 서사를 들려주기보다는 짧은 순간의 감정을 포착합니다.
기쁨보다는 평온, 열정보다는 사색, 외부 세계의 환호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듯한 음악입니다.
7. 위안과 코지마의 역설적인 연결
결국 위안과 코지마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건이라기보다 시간의 아이러니를 통해 연결됩니다.
위안이 완성되었을 때 코지마는 아직 어린 소녀였습니다. 훗날 그녀가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하고, 다시 바그너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바그너와 코지마의 관계가 시작된 뒤에도 리스트와 바그너의 음악적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습니다.
바그너가 리스트의 사위가 된 뒤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리스트에게 바그너는 음악적 동료인 동시에 딸의 남편이 되었고, 바그너에게 리스트는 존경해야 할 장인이자 자신의 음악을 지지했던 선배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의 관계가 개인적인 감정과 가족관계, 음악적 이상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대였습니다.
8. 조용한 피아노곡이 남기는 질문
위안이라는 제목은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모든 상처가 극적인 방식으로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곁에 머무는 음악 한 곡이 오히려 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리스트의 위안은 바로 그런 음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훗날 리스트의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고 나면 이 평온한 음악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딸이 자신의 친구이자 음악적 동료였던 바그너와 사랑에 빠지고, 그 관계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19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극적인 가족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사건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리스트는 이미 피아노 앞에서 조용한 위로의 음악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안을 감상할 때에는 불륜 스캔들의 배경음악으로 듣기보다는, 화려한 비르투오소였던 리스트가 보여준 내면적이고 명상적인 모습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 뒤에 자리한 한 인간의 삶까지 함께 바라본다면, 몇 분 남짓한 피아노 소품이 단순한 아름다운 선율 이상의 의미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의 중심에 서 있던 리스트가 잠시 모든 박수와 환호를 내려놓고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음악.
그것이 바로 리스트의 위안이 가진 가장 특별한 매력입니다.